(비평) 나규환과 인간들
- btlzu2
- 2023년 10월 12일
- 3분 분량
이 글은 르포르타주(reportage)의 형식을 닮아있다. 나규환, 전미영, 전진경 작가가 그들 스스로를 현장이라 불리는 곳에 파견해왔듯, 나 역시 그들의 작업실에 스스로를 파견한 경험을 살려 이 글을 적어보고 한다. 예술가의 고민과 삶, 그리고 작품은 몇 시간, 몇 번의 만남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닐테다. 다만 예술가의 삶과 글쓴이의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목격한 시간이 어떤 진실에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본다.
르포르타주 1 - 나규환 작가
나규환과 인간들
박수지 (큐레이터 / AGENCY RARY)
2021
어쩌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예술가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에 천착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술가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에 천착하는 예술가. 그만큼 예술 창작은 인간을 어떤 식으로든 고양시키거나 탐구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흙을 빚고, 철을 구부리고, 나무를 깎으며 고민하는’ 예술가 나규환은 그중 인간에 몰입하는 조각가로 보인다. 대학시절 그는 한 수업 시간에 ‘자유에 대해 표현해보라’는 교수의 질문에 큰 괴리를 느꼈다. 당장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푸른 하늘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같은 것이었다. 직관적으로 떠오른 그 이미지가 어째서인지 진부하게 여겨졌고, 결국 과제를 내지 못했다. 그 스스로의 작업의 최초 관객이 되곤 하는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괜찮은 작품인지 가장 먼저 알아챌 수 있는,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비평가이기도 하다. 나규환은 일단 만들어버리는 일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보며 좋은 조각에 대해 고민하다 군대에 다녀온다. 그 이후에도 어떤 조각가가 되어야 하나 하는 고민은 계속 되었다. 그러다 그의 불투명한 고민에 보다 선명한 고민을 더해줄 사람을 만났고, 그가 바로 작고한 조각가 구본주다.
나규환은 아직도 구본주의 말을 기억한다. ‘촌스러운 누드조각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세련된 조각을 할 수 있다’고 했던 그의 말을 기억하는 동시에 되새긴다. 그때부터 나규환은 현대 조각의 가능성을 다시 열어보기 시작했다. 로댕이나 미켈란젤로가 아닌 다른 조각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자유, 평등과 같은 큰 주제를 예술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민했고, 공허한 조각으로 여겨지던 ‘작업실 작업’의 방식을 바꾸기 시작한다. 나규환은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야기를 할 때 마음을 덜어내는 시간이 생긴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곧 예술가의 생활과 예술가의 창작의 거리를 좁혀나가는 시간이었다는 증언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의 첫 개인전 제목이 <인간>이었다는 점 또한 어색하지 않다. 인간을 떠나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조각에 예술가 스스로가 부대끼지 않고, 거짓과 꾸밈이 없이 접근 하는 일이 곤란하다고 여겨졌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간’은 무엇의 이름일까? 친구, 지인, 가족과 같은 내 시야에 들어온 사람들을 칭하는 범주일까? 나규환이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들은 이 질문에 대답이 되어줄 것 같다. “일 년에 며칠. 그것도 명절 때나 되어야쉬는 부모님과 동생의 삶은 왜 이렇게 고달플까요? 휴대폰 가게, 커피숍, 편의점, 통닭집은 왜 이렇게 많을까요? 하천에 흐르는 물은 왜 이렇게 더러울까요?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소중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나규환 작가가 동료 작가들과 함께 했던 ‘파견미술’이라는 선택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인간문제는 노동문제이기도, 환경문제이기도 하며, 생존과 죽음 사이에 있는 그 지난한 시간을 모두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규환이 세상이 좀 더 나은 쪽으로 가기를 바라며 믿고 있는 것은 자신의 예술이 그 삶과 죽음 사이의 인간문제에 개입할 여지를 만드는 일과 동행한다. 지금의 예술가가 처해있는 시대, 목격자가 된 시대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할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예술가에게 세상은 불가지한 전체가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서 접속하고 이해할만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다시 그 부분이 예술가의 세계를 구축한다.
물론 그 또한 현장 중심의 미술에 대한 비판들, 이를테면 작품이 원색적이고 일차원적이라는 식의 견해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서로 듣고, 보고, 배우며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앎이 깨져나가는 그 순간이 작가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 또한 진실이다. 나규환에게 현장과 작업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둘은 서로 다를 뿐, 양면 모두를 살피며 그 사이의 쓰임을 모색하는 예술가에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위치한다. 이는 일전에 그가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책을 펼쳤더니 첫 페이지에 ‘조각가는 살아있게 하는 자’라고 쓰인 것을 보고 책을 덮었다는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각가의 일이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이름이 계속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그에게, 조각은 아름다운 증언과도 같다.
그는 요즘 만화를 꿈꾼다. 개인전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며 사회인 야구장 기록원 아르바이트를 2년간 해오면서 생긴 도전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야구를 하겠다며 주말 내내 열심히 경기에 임하는 사람들을 보며 마라톤 하는 마음으로 만화의 구조와 틀을 짜고 있다. 조각도 자꾸 만화처럼 바뀌어가는 것 같다며 농 반 진 반의 말을 하는 그에게 만화는 의욕적이고도 즐거운 시도처럼 보인다. 또 하나의 큰 변화가 있다면, 작업실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빌라 주차장 한 켠에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세 평 남짓한 공간을 작업실로 써 온지 18년이 되었던 그가, 동료작가 전미영 조각가와 함께 포천에 공동 작업실을 열게 된 것이다. 두 작가의 창작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곳이 사람이 머물고 사람을 나누는 장소가 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분명 ‘나규환의 인간들’은 그곳에 기쁜 마음으로 발 디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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